화씨911-영화소개 
부시는 지금 불타고 있다 <화씨 9/11>, 현실에 폭탄을 던지다
필름 2.0 2004.07.13 / 주성철 기자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할리우드 박스오피스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섬머 시즌 초입, 부시 대통령을 향한 다큐멘터리 <화씨 9/11>이 모든 극영화들을 잠재워버린 것이다. 9.11 테러의 그늘 아래 부시 비판과 낙선을 부르짖는 이 영화가 지난 몇 주간 걸어온 숨가쁜 궤도를 추적한다.
'자네는 주정뱅이, 도둑에다 중범죄자였을 가능성이 짙을 뿐 아니라 재판도 안 받은 도망병, 게다가 울보란 말일세. 너무 심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다 자네를 생각해서 주는 쓴약이라는 것을 명심하게나. 양심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더 이상 가문에 먹칠하지 말고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부시 가문에 한 오라기의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우리를 위해 부시는 공짜로 주는 것은 안 받아먹는다는 자긍심을 보여 주게나.' 마이클 무어 저 <멍청한 백인들> 중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에서.
이제 부시가 걱정해야 할 것은 레임덕이 아니라 <화씨 9/11>이다. 김선일 씨 살해 일주일 전인 6월 16일 미국의 9.11테러조사위원회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 이라크가 사건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최종 발표했다. 이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가 9.11 테러에 연루됐다는 아무런 신빙성 있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부시가 시작한 이라크 전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 답을 제시하며 나온 영화가 바로 <화씨 9/11>이다.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이슈 메이커는 뚱뚱한 체구에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쓴 '카메라를 든 사나이' 마이클 무어다. 그가 바로 현재 '대선' 대리전의 주인공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기적에 가깝다. 여름 시즌의 개막과 함께 온갖 현란한 그래픽과 거대 마케팅 전술로 북적거려야 할 미국 극장가가 단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술렁이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부시 미국 대통령을 향한 마이클 무어의 폭탄 <화씨 9/11>은 지난 6월 25일 개봉, 주말 3일간 총 2,180만 달러(한화 약 261억 원)의 흥행 수익을 올려 개봉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더구나 <화씨 9/11>이 보통 메이저 극영화들의 절반도 안 되는 개봉 규모인 868개관에서 개봉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적이다. 미국 다큐멘터리 역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던 무어의 전작 <볼링 포 콜럼바인>(2002)이 250개관에서 9개월 동안 총 2,150만 달러를 벌어들인 기록을 단 3일 만에 깨버린 것이다.
이로써 '부시 낙선 운동 다큐멘터리'라 불러도 좋을 <화씨 9/11>이 당초 <스파이더맨 2>가 등장하기까지 적당히 선전하면 성공이라던 분위기는 완전히 역전됐다. 온라인 예매 사이트 'fandango.com'에서는 48%의 예매율로 <스파이더맨 2>의 9%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며 당연히 비슷한 시기 개봉작들 중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출구 조사의 호감도까지 감안해볼 때 이것은 이슈에 기댄 반짝 흥행으로 끝날 것 같진 않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 6월 27일 15개 도시의 <화씨 9/11> 상영관 앞에서 일제히 실시된 출구 조사에서 응답자의 90% 이상이 '반드시 추천하겠다'고 답했다. 이로 인해 <스파이더맨 2>의 샘 레이미 감독은 마이클 무어 못지않게 부시를 탓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그가 감독했던 <스파이더맨>의 경우 스파이더맨이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 사이에 거미줄을 치고 은행 강도를 붙잡는 장면이 예고편에 삽입됐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해 예고편 상영이 중단되기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화씨 9/11>이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거둠에 따라 오는 11월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이하'대선')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미 'USA 투데이' '뉴욕 타임스' 등 유수 언론들이 <화씨 9/11>이 올해 대선을 앞두고 부동층의 표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내다봤다.
"마이클 무어의 배급 전략은 환상적이다. 물론 우리의 전략은 이것과 다르다. 그는 매우 특수한 인물이다. 상업적인 체제를 뚫고 들어가는 개성적인 전략을 갖고 있으며, 한계가 있긴 하지만 굉장히 효과적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굉장히 웃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못 웃긴다. 그러니 같은 전술을 쓸 수가 없다. 그처럼 개인의 특수한 개성을 활용해 체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 체제 밖에서 네트워크를 강화, 압력을 행사해 뚫고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릭 로울리 감독. 1994년 1월부터 시작된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사파티스타>(1998) 연출.
화씨 원정대 만세!
<화씨 9/11>의 첫 번째 '봄날'은 올해 칸영화제였다. 칸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문화 예술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위에 합세한 마이클 무어는 각종 기자 회견과 인터뷰를 뜨겁게 달구며 여느 배우들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기자 회견을 통해 "내가 가진 가장 큰 공포는 부시의 재선"이라고 말한 그는 칸영화제 기간 중 오로지 올 미국 대선에서의 부시 낙선 운동에 몸 바친 사람처럼 보였다. 전통적으로 견고한 의미의 세계 작가 영화 전시장이 되어온 칸영화제에 있어 그것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변화를 내세운 올해 칸영화제는 <화씨 9/11>의 손을 들어주었다. 마이클 무어의 도발적인 프로파간다에 눌려 <화씨 911>의 냉철한 의미와 진실을 헛짚거나 우회하는 누를 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화씨 9/11>은 마이클 무어의 이전 다큐멘터리들보다 여러모로 진화해 있었다. 이후 마이클 무어는 "알 카에다와 관계된 조직에 의해 공개적으로 참수된 미국인 닉 버그의 생전 모습을 담은 20분가량의 인터뷰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밝혀 또다시 화제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유가족의 요구로 인해 그 장면을 영화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내용 또한 밝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화씨 9/11>이 올 칸영화제에서의 황금종려상 수상과 더불어 흥행 돌풍 등 최선의 결과를 낳긴 했지만 그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먼저 지난 5월 제작사 미라맥스의 자회사 디즈니가 공화당의 압력으로 일찌감치 배급을 포기했다. 마이클 무어는 디즈니를 맹렬히 비난했지만 그들은 음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칸영화제에서의 수상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우선 디즈니로부터 <화씨 9/11>의 판권을 재매입한 미라맥스 대표 하비와 밥 와인스타인 형제는 배급을 위해 구성된 이른바 '배급 원정대'인 'Fellowship of Adventure Group'을 통해 6월 25일 개봉할 것임을 밝혔다. 배급사 라이언스게이트엔터테인먼트, IFC필름과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이때 마이클 무어는 한 인터뷰를 통해 와인스타인 형제를 각각 프로도와 샘으로, 배급사들을 원정대에 비유하면서 부시 대통령이 사우론임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배급이 결정된 뒤에도 <화씨 9/11>의 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발생했다. 먼저 <화씨 9/11>이 제목을 따온 SF 소설 <화씨 451>의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지난 6월 19일 저작권 침해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던 <화씨 451>은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소방관들이 책을 없애기 위해 집과 도서관에 불을 지르는 암울한 상황을 담고 있다. 브래드버리는 "마이클 무어가 그런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이클 무어의 회사에 연락을 취했지만,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 말하고는 6개월을 그냥 보내 버렸다"고 말했다. 소송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책 제목을 꼭 돌려달라"는 입장이라 여전히 논쟁의 불씨는 남아 있다. 하지만 <화씨 451>에서 영감을 얻어 "화씨 451이 책이 불타는 온도라면 화씨 911은 진실이 불타는 온도"라고 말했던 무어의 얘기를 경청해볼 때 쉽지 않은 문제다. 한편 <화씨 9/11>이 개봉을 앞두고 MPAA(미국영화협회)로부터 R등급(17세 미만은 부모 동반)을 받은 것은 결정적으로 무어를 격노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배급사 중 하나인 라이언스게이트엔터테인먼트의 대변인 조나단 세링은 "우리는 이 불합리한 등급 제도에 맞서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영화협회는 이 영화에 R등급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바랍니다. 특히 <화씨 9/11>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가 매일 저녁마다 TV 앞에 모여 봐야 했던 것 이상의 폭력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미국영화협회가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행위에 대해 '너무나 혐오스럽고 질서 파괴적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봐서는 안 되는 것'으로 판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만들고 있는 현실의 장면들이야말로 NC-17 등급(17세 미만 관람 금지)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모든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부시 정부가 10대 후반들을 이라크에 보내 죽여도 된다고 믿는다면, 이후 1~2년 사이 징집 연령이 될 10대들은 부시가 그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려 하는 이유에 대해 '알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씨 9/11> 개봉에 부쳐 마이클 무어가 자신의 홈페이지(www.michaelmoore.com)에 올린 글 중에서.
부시를 향해 쏴라
<화씨 9/11>은 부시가 자신의 독단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떻게 9.11 테러와 3천여 명의 희생자들을 악용했는지, 사실은 부시 집안과 오사마 빈 라덴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공생 관계를 이어왔는지 폭로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지금의 이라크 전쟁이 얼마나 헛된 엉터리 전쟁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오직 끄집어내려지기 위해 부시는 무대에 오른다. 공화당 측이 <화씨 9/11>을 두고 "대선을 겨냥한 민주당과 마이클 무어의 비열한 합작품"이라고 흥분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상 '부시의 낙선'은 <화씨 9/11>의 가장 중요한 영화적 모티프다. '할리우드 리포터'지의 커크 허니컷은 "<화씨 9/11>은 그저 대선을 위한 책략으로서의 리얼리티 영화다. 영화가 늘어놓는 사실들은 이미 출판된 책들과 정치 논평들의 자료들에 비해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무어가 노리는 단 하나의 효과라면 영화라는 것이 인쇄 매체보다 더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화씨 9/11>이 얼마나 좋은 영화냐 아니냐가 아니라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 얼마나 큰 힘을 보탤 수 있느냐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화씨 9/11>의 기승전결은 이렇듯 부시를 까발리고 파헤치는 데 전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적어도 마이클 무어는 그것이야말로 당대의 영화 미학마저 넘어서는 현실적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는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플로리다 재검표 소동으로 문을 연다. 당시 부시의 승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뉘앙스로 시작한 영화는 시종일관 맹렬하게 부시를 풍자하고 골탕 먹인다. 여느 코미디영화도 이보다 더 웃길 순 없다. 자료 화면의 나열과 적절한 편집 효과가 전해주는 웃음은 영화의 불온함(?)을 더욱 과시한다. 부시 가문과 사우디아라비아 및 알 카에다 집단 간의 오랜 부적절한 커넥션을 소상하게 묘사하고, 9.11 테러가 일어나던 날 아침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부시가 한 참모로부터 사태를 보고받는 장면에 이르러 첫 번째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부시가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10분 가까이 아무렇지도 않게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보여 준다. 귓속말로 전해 듣고 부시가 보여 주는 표정도 "뭐라구!!!" 하는 식의 놀라움의 표정이 아니라, 비약을 조금 허용하자면 "한다더니 정말 했네"하는 식의 어느 정도 사태를 예감한 사람의 멀뚱한 표정이다. 이렇게 마이클 무어는 거대한 음모 이론 속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2004년 선거에서 조지 부시를 패배시키는 일보다 온 국민이 직면한 더 큰 지상 과제는 없을 것이다. 파멸로 가는 모든 길이 그와 그의 행정부를 관통하고 있다. 이 미친 세월이 4년 더 지속된다면 캐나다조차도 그렇게 추운 나라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4년 더? 나는 4분도 못 견디겠다. 내가 지난 1년 동안 받은 수천 통의 이메일과 편지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절박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는 무얼 할 것인가?' 마이클 무어 저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 중 '부시 제거를 위한 봄맞이 대청소'에서.
이라크 전쟁을 중단하라
마이클 무어의 유일한 극영화 <캐나다 베이컨>(1995)에서 냉전 종식 이후 인기가 시들해진 미국의 보수 우익들과 군산 복합체는 어처구니없게도 캐나다를 새로운 적으로 간주한다. 부패한 정치권과 언론은 가공할 음모를 꾸미고 여론 조작에 나선다. 그런 풍자와 조소가 가장 실소하게 만드는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캐나다를 쳐부수기 위해 달려가는 부머(존 캔디) 일당이 버스 안에서 단결을 과시하며 합창하는 장면이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Born in the USA'를 부르지만 가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적당히 웅얼대다 "Born in the USA~"라는 익숙한 후렴구만을 열렬히 외칠 뿐이다. <화씨 9/11>에서 부머 일당은 바로 부시 행정부다. 이미 여러모로 증명된 것처럼 현재 이라크는 <캐나다 베이컨>의 캐나다처럼 가공의 적에 가깝다. 그토록 걱정하던 대량 살상 무기는 발견되지도 않았고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은 미국의 도덕성에 심각한 적신호를 울렸다.
<화씨 9/11>의 후반부는 전적으로 이라크 전쟁에 할애돼 있다. 평화롭던 동네 놀이터가 '이라크 해방'이라는 미국의 헛된 슬로건 아래 어떻게 짓밟혀왔는지, 그리고 오랜 문명의 보고 이라크의 각종 자원들이 어떻게 파괴돼 왔는지를 처연하게 보여 준다. 거기엔 부시의 탐욕 아래 원치 않는 전쟁에 발을 담글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미국인들의 초상도 더해진다. 한 어머니는 죽은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낭독하며 흐느끼고, 무어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지나가는 의원들을 붙잡고 "당신 아들을 이라크에 보내기 위한 지원서에 사인하지 않겠소?"라며 일일이 권유한다. 평소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에 비판적이었던 비평가 제임스 로치도 "<화씨 9/11>은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인과 이라크 가족들이 겪은 상실감과 슬픔에 대해 강력한 인상을 제공하고 있다. 매우 직접적이면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방식으로 찢겨 나간 삶을 보여 주는 묘사가 특히 훌륭하다"고 말했다.
물론 마이클 무어의 장기가 관객들과 열정적으로 조응하는 대목은 여전히 조롱과 냉소다. 인서트 컷처럼 삽입되는 코믹한 장면들, 전후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 자료 화면들, 혹은 그 자신이 직접 프레임에 등장할 때 관객들은 땅을 치며 환호한다. 그에 대해 선정적이고 출세주의적이라는 오랜 비판의 일정 부분은 때로 수긍할 만하며, 무어 또한 '원맨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 해오면서 스크린에서 드러날 때 여느 극영화 스타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신의 스타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화씨 9/11>이 과연 올해 칸영화제 경쟁작들 중 미학적인 측면에서 황금종려상감인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귀결되는 지점은 새롭게 조명돼야 할 당대의 문화 정치학이다. 여전히 야만의 질서가 횡행하는 사회, 넘쳐나는 거짓 이미지들의 세상 속에서 예술적 발상 또한 전혀 다른 영향 속에 놓여 있다. 올해 칸영화제는 밀레니엄 이후 바로 그러한 긴장을 보여 준 첫 번째 사례다. <화씨 9/11>은 그 어떤 영화적 형식마저 넘어서는 현실의 무게를 담아낸다. 그리고 미국 개봉 이후 <화씨 9/11>은 상업화된 멀티플렉스 내에서 텍스트와 컨텍스트, 주류 문화와 대안 문화의 경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도저한 진실의 힘을 보여 줬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화씨 9/11>이 지닌 힘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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